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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 대화 실전 후기 (엄마와의 갈등, 욕구 이해, 4단계 적용)

by 통찰심리노트 2026. 2. 27.

재작년 여름, 어머니와 한 달 넘게 통화를 끊고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독립하겠다는 제 결정을 두고 매번 통화할 때마다 "너는 왜 항상 철이 없니?"라는 말씀을 들었고, 저는 "내 인생에 왜 간섭해?"라고 맞받아쳤습니다. 통화는 늘 고성으로 끝났고, 어느 순간부터는 어머니 전화벨만 들어도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그때 우연히 접한 비폭력 대화(NVC)라는 개념이 저와 어머니의 관계를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갈등 상황에서 발견한 욕구의 언어

갈등 한가운데 있을 때는 상대방의 말이 전부 공격처럼 들립니다. 어머니의 "철이 없다"는 말은 저를 평가하고 재단하는 비난으로만 느껴졌고, 저 역시 "왜 항상 간섭하냐"며 똑같은 방식으로 되받아쳤습니다. 그런데 비폭력 대화 관련 책을 읽으면서 충격적인 문장을 발견했습니다. "갈등은 욕구 수준에서는 발생하지 않고, 전략 수준에서만 발생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프레임으로 저희 모녀의 싸움을 다시 들여다보니, 어머니의 진짜 욕구는 '자녀의 안전과 경제적 안정'이었고 제 욕구는 '자율성과 자아실현'이었습니다. 두 욕구 모두 지극히 인간적이고 정당한 것인데, 저희는 그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법에서만 충돌하고 있었던 겁니다. 어머니에게 "안정적인 직장"은 안전을 지키는 전략이었고, 저에게 "프리랜서 독립"은 자율성을 실현하는 전략이었을 뿐입니다.

이 깨달음이 제게 완전히 다른 시야를 열어줬습니다. 어머니의 비난 뒤에 숨어 있던 두려움과 사랑이 처음으로 또렷하게 보였습니다. 그동안 저는 어머니가 저를 통제하려 한다고만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제가 고생할까 봐 무서워하셨던 겁니다.

4단계 실전 적용과 예상 밖의 반응

며칠간 고민 끝에 어머니께 먼저 전화를 걸었습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지만, 관찰-느낌-욕구-부탁의 4단계를 메모지에 적어놓고 최대한 따라가려 노력했습니다. "엄마, 지난번에 제가 프리랜서 하겠다고 했을 때 엄마가 '철이 없다'고 하셨잖아요. 그때 저는 정말 서운하고 답답했어요. 사실 저는 제 선택을 엄마한테 인정받고 싶었고, 동시에 제 인생을 스스로 결정하고 싶은 마음이 컸거든요. 엄마가 제 결정 자체를 존중해주시면서, 걱정되는 부분이 있으면 함께 이야기해주시면 정말 큰 힘이 될 것 같아요."

말을 하면서도 목소리가 떨렸고, 중간에 "역시 엄마는 이해 못 하실 거야"라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바로 반박하셨을 텐데, 한참을 침묵하시더니 "엄마가 너한테 철없다고 한 거, 미안하다. 엄마는 그냥 네가 고생할까 봐 무서웠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솔직히 4단계를 완벽하게 밟아나간 건 아니었습니다. 중간에 비난의 말이 튀어나올 뻔한 순간도 여러 번 있었고, 지금도 갈등 상황에서는 방어적인 반응이 먼저 올라옵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달라진 것은, 비난의 말 뒤에 숨겨진 욕구를 상상하려는 습관이 생겼다는 점입니다.

현실에서 부딪친 한계와 문화적 고민

그런데 비폭력 대화를 실제로 써보니 생각보다 까다로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상대방이 NVC를 전혀 모르는 경우입니다. 제가 아무리 "저는 슬퍼요, 연결의 욕구가 있어요"라고 말해도 상대방이 "뭐 이런 이상한 말투를 쓰냐"며 비웃는다면 대화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또 한국 문화적 맥락에서는 더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명절 모임에서 어른에게 "저는 지금 자율성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 답답합니다"라고 말하는 건 이론적으로는 맞지만, 실제로는 관계의 파탄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연장자에게 자신의 욕구를 직접 말하는 것을 버릇없음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분명히 존재하거든요.

권력 불균형이 심한 관계에서도 쉽지 않았습니다. 직장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폭언을 하는 상황에서 "제가 당신에게 존중의 욕구가 있어서 지금 두렵습니다"라고 말하는 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습니다. 가정 폭력이나 정서적 학대 상황에서 피해자에게 "가해자의 충족되지 않은 욕구를 공감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오히려 2차 가해가 될 위험도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비폭력 대화를 상황에 맞게 변형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형식적인 4단계를 다 지키기보다는, "지금 저 사람이 진짜 원하는 게 뭘까?"라는 질문 하나를 속으로 품는 것만으로도 대화의 온도가 몇 도씩 낮아지는 걸 경험했습니다. 어머니가 "남들은 다 그런데"라고 말씀하실 때, 예전에는 "또 비교하시네"라고 화를 냈지만, 지금은 속으로 "엄마는 지금 안전의 욕구가 불안해서 저렇게 말씀하시는 거구나"라고 한 번 번역해봅니다.

이 경험을 통해 제가 가장 크게 배운 것은, NVC는 상대방을 바꾸는 기술이 아니라 나의 듣는 방식을 바꾸는 기술이라는 것입니다. 같은 말이라도 판단의 귀로 들으면 공격이 되고, 욕구의 귀로 들으면 도움을 요청하는 외침이 됩니다. 아직 갈등의 순간에 완벽하게 적용하기는 어렵지만, 그 한 번의 멈춤이 판단에서 연결로, 공격에서 공감으로 방향을 바꾸는 첫걸음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다음에 누군가와 갈등이 생겼을 때, 비난의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지금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먼저 자신에게 던져보시길 권합니다.


참고: https://en.wikipedia.org/wiki/Nonviolent_Communi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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