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97.6%가 상사나 동료의 눈치를 본 적이 있다는 조사 결과가 있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 수치를 보고 "나머지 2.4%는 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싶었습니다. 퇴근 버튼을 누르지 못해 모니터만 들여다보던 날들, 회의실에서 반대 의견을 삼켰던 순간들이 단순히 제가 소심해서가 아니라 한국 조직 특유의 고맥락 문화와 집단주의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분석을 접하면서, 제 경험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퇴근시간과 회의침묵, 눈치의 두 얼굴
한국 기업에서 눈치는 생존의 도구입니다. 특히 퇴근 시간 눈치 보기는 직장인들이 가장 자주 겪는 스트레스 상황으로 꼽힙니다. 설문조사에서 52%가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 아무도 일어나지 않을 때" 가장 눈치를 본다고 답했는데, 제 경험도 정확히 이랬습니다. 입사 첫해 정시 퇴근이 6시였지만 실제로 6시에 나간 날은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업무가 남아서가 아니었습니다. 팀장님이 앉아 계시고 선배들도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저만 가방을 싸는 게 눈에 띌까 봐 두려웠던 겁니다.
어느 날 용기를 내서 6시 10분에 일어났더니 팀장님이 "벌써 가?" 한마디를 던지셨습니다. 웃으면서 하신 말씀이었지만, 제게는 "너의 태도를 보고 있다"는 경고로 들렸습니다. 그 이후 한 달간 7시 전에는 절대 퇴근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현상을 설명하는 개념이 '침묵의 나선' 이론입니다. 자신의 의견이나 행동이 조직 내 지배적 분위기와 다르다고 느끼면, 고립에 대한 공포 때문에 침묵을 선택하게 된다는 겁니다.
회의실에서의 침묵은 더 심각합니다. 2년 차 때 신규 프로젝트 기획 회의에서 팀장님이 제안한 방향이 타겟층과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분명히 들었습니다. 경쟁사 데이터를 봐도 그 방향은 이미 실패한 전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회의실 분위기는 이미 "좋은 방향입니다"로 흘러가고 있었고, 선배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며 저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신입이 팀장님 의견에 정면 반박하면 건방지다는 인상을 줄까 봐, 혹시 제가 틀렸을 때 창피당할까 봐 겁이 났던 겁니다.
결국 그 프로젝트는 3개월 만에 방향을 수정했고, 처음 제가 느꼈던 문제점이 정확히 실패 원인으로 지목됐습니다. 이때 경험한 게 '다원적 무지' 현상입니다. 실제로는 여러 사람이 반대 의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서로가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나만 빼고 모두가 찬성한다"고 착각하게 되는 거죠. 이런 집단적 착각이 조직의 의사결정에 치명적인 오류를 만들어낸다는 걸 그때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심리적안전감이 없는 조직의 대가
눈치 문화가 지배적인 조직의 가장 큰 문제는 심리적 안전감의 부재입니다. 심리적 안전감이란 구성원이 자신의 의견을 내거나 실수를 고백했을 때 보복이나 비난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뜻합니다. 제가 다녔던 조직은 이 안전감이 거의 없었습니다. 문제를 발견해도 보고하기를 망설였고, 실수가 생기면 숨기기에 급급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혁신이나 창의적 실험 같은 건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회식 자리에서의 연기는 정신적 소모를 극대화했습니다. 금요일 저녁, 집에 가고 싶었지만 "다 가는데 너만 안 가?"라는 무언의 압박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자리에서도 팀장님 잔이 비면 얼른 채워드려야 했고, 분위기가 좋을 때 먼저 일어나면 분위기 파악 못하는 사람이 될까 봐 끝까지 남았습니다. 웃고 싶지 않은 농담에도 웃었고, 관심 없는 이야기에 과장된 리액션을 했습니다. 집에 돌아오면 몸보다 마음이 더 지쳐 있었습니다. 이런 '표면 연기'가 반복되면 번아웃 증후군으로 이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는데, 제 경험상 정확히 맞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눈치가 조직의 화합을 도모하는 긍정적 기능도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그건 표면적인 평화일 뿐입니다. 실제로는 구성원들이 진짜 생각을 숨기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갈등의 씨앗이 쌓이고 있었습니다. 신입 사원에게 바라는 덕목 1위가 '업무 역량'이 아니라 '눈치 빠른 센스'라는 조사 결과는, 한국 기업들이 겉으로는 전문성을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여전히 관계 중심의 맥락 읽기를 최우선 가치로 둔다는 걸 보여줍니다.
AI 기술이 눈치 문화를 완화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지만, 저는 오히려 반대 현상도 관찰됩니다. 슬랙이나 팀즈 같은 메신저에서 상사의 읽음 표시, 응답 속도, 이모지 선택까지 신경 쓰는 '디지털 눈치'가 새롭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기술이 맥락을 줄여줄 것이라는 낙관은, 그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심리적 관성을 과소평가한 것 같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의 저는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 진짜 제 모습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퇴근도, 의견도, 감정도 전부 타인의 반응을 기준으로 결정했습니다. 이런 경험들이 쌓이면서 점점 "어차피 말해봤자"라는 무기력에 빠졌고, 일에 대한 열정보다는 눈치에 대한 피로가 하루를 지배했습니다. 결국 눈치는 저를 보호해준 게 아니라 조금씩 소진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한 가지 원칙을 정했습니다. 최소한 업무와 관련된 의견만큼은 근거가 있다면 반드시 말하자는 것입니다. 그 한마디가 가져올 불편함보다, 침묵이 가져올 후회가 훨씬 크다는 걸 저는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조직은 눈치를 보지 않는 곳이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며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조화가 이루어지는 곳이라고 믿습니다.
참고: https://her.re.kr/journal/view.php?doi=10.6115/fer.2013.51.4.413